배움이 좋아서, 대학이 재미없다
요즘 고민이 있다. 대학이 너무 재미없다는 것이다.(또는 답답함)
철학,심리,정치,경제 네 개의 전공을 동시에 붙들고 있고, 아마 주변 누구보다 대학을 재밌게 다니는 인간으로 보일 것이다. 그런 내가 재미없다고 말하는 건 이상하게 들린다. 역설적이게도, 배움이 너무 좋아서 대학이 재미없다. 배움과 대학이 같은 것이었다면 이런 문장은 성립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 둘이 어긋나 있다는 감각, 그것이 요즘 계속 나를 답답하게 하는 고민의 정체다.
마침 두 명의 교수가 각자의 자리에서 같은 곳을 겨누는 이야기를 했다. 서울대 심리학과 박주용 교수, 그리고 포스텍 인문사회학부 이충형 교수. 한 사람은 교육이라는 시스템 자체를, 다른 한 사람은 그 시스템이 길러낸 사고방식을 비판했다. 서로 다른 방향이지만 같은 곳을 향한다.한국 교육이다.
박 교수는 세 개념을 위계로 나눈다. 가장 넓은 것이 학습이다. 지식을 습득하고 활용하는 능력 전체. 이 학습을 촉진하는 두 갈래가 교육과 공부다. 교육은 사회 제도다. 사회가 원하는 것을 위에서 아래로 가르친다. 공부는 다르다. 내 호기심과 "잘하고 싶은 것"에서 출발해, 주제도 과정도 계획도 스스로 고르는 일이다.
여기서 그는 "안다"를 다시 정의한다. 대부분의 사람은 "들어봤다", "본 적 있다"를 안다고 여긴다. “유튜브에서 봤어, 그거 알아.” 박 교수는 이것을 유치원 수준의 앎이라 부른다. 진짜 앎은 내가 아는 것과 모르는 것의 경계를 정확히 긋는 상태다.
흔히 이 대목에서 소크라테스의 "나는 내가 모른다는 것을 안다"를 떠올린다. 그러나 둘은 미묘하게 다르다. 소크라테스의 무지(無知)의 지(知)가 모른다는 사실에 대한 자각이라면, 박 교수가 말하는 건 그 경계를 정밀하게 그어내는 능력이다. 자각을 넘어 측량으로. 어디까지가 앎이고 어디부터가 모름인지, 선을 그을 수 있어야 한다.
그렇다면 그 경계는 어떻게 긋는가. 질문을 던져야 긋는다. 이 질문의 정체가 무엇인지는, 글의 끝에서 다시 만나게 될 것이다.
박 교수의 진단을 한 문장으로 줄이면 이렇다. 교육은 받았는데 공부할 줄 모른다.
말이 되지 않는 문장인데, 데이터가 그것을 뒷받침한다. 열다섯 살 한국 학생의 문해력과 사고력은 OECD 최상위다. 그런데 성인이 되면 평균 이하로 내려앉는다. 세계에서 가장 오래 공부하는 학생들이, 다 자라고 나면 가장 공부할 줄 모르는 성인이 된다.
구조를 보면 이유가 보인다. 초·중·고는 수능이라는 단일 목표에 묶여 있다. 그 아래 무엇을 바꿔도 정점이 그대로라 변하지 않는다. 대학이라고 다르지 않다. 학점과 입사시험이 정점을 차지하고, 그래서 학생들은 깊은 수업 대신 학점 쉬운 강의를 찾아다닌다. 그 결과 지식은 휘발성을 띤다. 시험을 보기 위해 외우고, 다음 과목을 외우기 위해 방금 외운 것을 버린다. 이 버리기를 4년간 반복하고 졸업한다.
문제의 뿌리에 "모르면 외워라"라는 만트라가 있다. 그런데 암기란 본래 생각한 것을 기억하는 일이다. 왜 그렇게 되는지 따진 뒤에 자연히 남는 것이 암기다. 그 과정을 건너뛰고 결과만 삼키면, 성과는 빨리 나지만 멀리 가지 못한다. 무엇보다 배움의 즐거움과 유용성을 경험하지 못한다. 그러니 성인이 되어 "그 괴로움을 왜 또 하나"가 된다. 인생은 100미터 달리기가 아니라 도착지가 정해지지 않은 달리기인데, 우리는 단거리 주법만 훈련받고 트랙 밖으로 나선다.
박 교수는 이 구조의 핵심에 공정성이 있다고 본다. 선다형 시험이 공정해 보이지만, 그것은 전문성을 인정하지 않는 공정성이고, 결국 서열 세우기 용도밖에 못 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한 가지 의문이 생긴다. 한국만 공정에 목매는 게 아니다. 독일도 공정에 목맨다. 두 나라의 배경은 전혀 다른데, 어떻게 같은 곳에 도착했을까.
사실 도착지가 같아 보이는 것은 착시다. 두 사회의 공통점은 공정 그 자체가 아니라, 사람의 재량(裁量)에 대한 불신이다. 판단을, 재량을, 관계에 기댄 배분을 믿지 못해 심판을 절차로 대체한다. 규칙이 신성해지는 것은 아무도 못 믿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불신의 뿌리는 정반대다.
독일이 두려워한 것은 자의적 권력이다. 바이마르의 붕괴와 나치라는, 재량이 만든 20세기의 재앙이 "모든 것을 규칙으로 묶어 자의를 봉쇄하라"는 강박을 낳았다. 그래서 독일의 공정은 시장과 불평등을 제약하는 방향으로 일한다. 김나지움 트랙에서 떨어져도 사회적 죽음이 아니다. 그 아래에 직업교육의 존엄과 두터운 복지가 받치고 있기 때문이다.
한국이 두려워한 것은 반칙과 특혜다. 천 년 넘은 과거제의 기억, 한두 세대 만의 압축적 계층이동, 연줄에 대한 깊은 불신이 겹쳐 공정은 "힘 있는 자가 판을 흔들지 못하게 막는 방벽"이 되었다. 그래서 채점자의 재량이 0인 시험, 이의제기가 불가능한 선다형이 신성해진다. 그런데 이 공정은 승자독식의 단일 사다리 위에 얹혀 있다. 게이트는 공정하지만 그 뒤는 절벽이다. 여기서 결정적 전도가 일어난다. 게이트의 공정이 결과의 불평등을 정당화하는 알리바이가 된다. "시험은 공정했으니 이 격차는 능력의 결과다."
독일의 공정은 불평등에 브레이크를 걸고, 한국의 공정은 불평등에 면죄부를 준다. 같은 단어가 정반대의 일을 한다. 그리고 박 교수가 말한 "전문성을 인정하지 않는 공정성"은 바로 이 한국적 구조의 필연적 산물이다. 채점자의 판단을 믿지 못하니, 판단이 필요 없는 시험만 남긴다. 개혁이 옳다는 걸 모두가 알면서도 안 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시스템의 희생자. 이 말은 너무 유감스럽다. 너무나 맞는 말이기 때문이다.그렇다면 우리는 가만히 있어야 하는가. 제도는 무겁다. 수능은 2040년에야 폐지된다고 한다. 그때까지 기다려야 하는가. 열다섯 해를 더 기다려 제도가 바뀐 뒤에야 제대로 공부할 수 있다면, 지금의 나는 무엇을 해야 하나.
박 교수의 답은 명료하다. 교육이라는 경로가 막혔다면, 남은 것은 공부라는 경로다. 학습에는 두 갈래가 있었다. 교육에 엑스 표가 쳐졌다면, 공부를 살릴 수밖에 없다. 그가 작년에 낸 책의 제목이 『공부의 재발견』인 이유다.
방법은 오래된 곳에서 온다. 베이컨은 짧은 에세이에서 이렇게 적었다. 독서는 풍부한 사람을, 토론은 준비된 사람을, 글쓰기는 정확한 사람을 만든다. 세 가지를 각각 옮기면 이렇다. 읽기는 질문이 떠오를 때까지 다시 읽는 것. 질문이 나오지 않으면 아직 읽은 게 아니다. 토론은 뜻 맞는 친구들과 생각을 표현하고 나누며 내 오류를 고치는 것. 혼자서는 떠오르지 않던 생각이 대화에서 예리해진다. 글쓰기는 규칙을 지켜 생각을 정리하는 일이자, 내 생각의 허점을 드러내는 가장 정직한 도구다. 말은 유리하게 얼버무릴 수 있지만, 글은 그러지 못한다.
이 지점에서 AI를 빼놓을 수 없다. AI를 쓰지 말라는 말은 무의미하다. 필요한 정보를 언제든 꺼내 쓸 수 있는 시대에 암기는 이미 쓸모를 잃었다. 중요한 것은 AI를 학습시키는 일이 아니라, AI를 통해 내가 학습할 거리를 끊임없이 생성해내는 일이다. 그렇다면 배워야 할 것은 세 가지로 좁혀진다. 첫째, 문제가 무엇인지 정확히 파악하는 법. 둘째, 그 문제를 풀기 위한 과정을 설계하는 법. 셋째, 그 과정에 필요한 정보를 질문하는 법.
두 번째 이충형 포스텍 교수는 지난해 2026학년도 수능 국어 17번에 "정답이 없다"고 주장해 화제가 되었고, 올해 그 근거를 한국분석철학회 학술지에 논문으로 실었다. 인격 동일성을 다룬 그 지문을, 서울대 물리학과를 나와 미네소타대에서 철학 박사를 받은 그조차 이해하기 어려웠다고 고백한다.
그러나 그가 정말 겨눈 것은 문항 하나의 오류가 아니다. 한국식 문제풀이 방식 전체다. 그가 지목한 잘못된 방식은 이것이다. 비슷한 단어들을 연결 지어 정답을 추론하기. 많은 이들이 "지문은 어려워도 17번은 쉽게 풀 수 있다"고 말하는데, 이 교수는 바로 그 사실이 문제라고 본다. 지문을 제대로 이해해서가 아니라, 단어의 표면적 유사성을 맞춰보는 요령으로 답을 골라냈다는 증거이기 때문이다.
그가 제시하는 대안은 문해력의 재정의다. 진정한 문해력은 지문과 선지 사이의 표면적 일치를 확인하는 기술이 아니다. 표현의 의미를 명확히 이해하고, 엄밀한 논리로 생각을 끝까지 밀어붙이는 능력이다.
이제 두 개의 화살이 만나는 지점이 보인다. 박주용은 "모르면 외워라"를 비판했고, 이충형은 "비슷한 단어를 연결하라"를 꾸짓었다. 표현은 다르지만 겨냥은 하나다. 과정 없는 정답. 사고 과정을 건너뛰고 결과만 삼키는 것, 이해를 건너뛰고 패턴 매칭으로 답만 찍는 것. 한국 교육이 십수 년간 길러온 것이 바로 이 능력이다.
하필 2026년 7월에는 이 능력이야말로 AI가 압도적으로 잘하는 일이다. 암기와 패턴 매칭에서 인간은 기계를 이길 수 없다. 이미 졌다. 그렇다면 이 방식으로만 훈련된 인간의 시장가치는 얼마인가. 0으로 수렴한다.
남는 것은 판단과 추론, 그리고 독창성이다. 지금 지구에 80억 명이 산다는 것은 80억 개의 세계관이 있다는 뜻이다. 그러나 80억 개가 모두 같은 값은 아니다. Claude도, GPT도, Gemini도 아무리 쏟아져 나와도 결국 그들의 관점 또한 하나의 관점일 뿐이다. 그렇다면 무엇이 어떤 관점을 가치 있게 만드는가. 이 질문에 답하지 못하면, "독창성이 중요하다"는 말은 공허한 구호로 끝난다.
흔히 사람들은 자기가 불공평한 시스템의 희생자라고 쉽게 생각해버린다. 그런 생각은 너무나 유감스럽다. 왜냐면, 너무나 맞는 말이기 때문이다. 아마도, 우리 대부분은 이 이해할 길 없는 불공평한 운명의 희생자일 것이다. 이런 운명을 제도적으로 개선하기 위해서는 우리는 온갖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그리고 그 노력은 계급 간, 인종 간, 성별 간 이해관계를 뛰어넘는 연대를 필요로 한다. 그러나 그런 사회적인 차원의 노력 이전에, 우리는 그런 운명을 개선하기 위한 개인적 노력 또한 기울여야 한다. 그리고 그런 노력을 존중해야 한다. 왜냐면 그런 노력 없이는 주체적인 삶을 살 수가 없다. 주체적인 삶 없이는 어떤 제도적 도움이 있다고 해도인간은 행복해질 수 없다.
사회적인 불의와 폭력 그리고 운명의 광폭함을 개인적 노력만으로 극복하라는 이데올로기의 허구를 밝히는 노력과 개인적 노력으로 사회적 불의와 폭력과 운명의 불공평함을 극복하려는 시도는 동등하게 높이 평가해야 한다. 그리고 우리는 모두 구체적으로 그 방법을 찾아야 한다. 그런데 문제는, 그 문제의 근원적 심각성은, 그 방법을 누구도 가슴에 와 닿게 가르쳐줄 수 없다는 데 있다. 이는 마치 김태희에게 연기하는 법을 가르쳐줄 수 없는 것과 같다. 스스로 깨닫지 않는 한, 누가 어떤 언어와 방법을 동원해도, 그걸 가르쳐주는 것은 불가능하다.
<모두가 같은 곳을 바라보지만 서로 다른 꿈을 꾼다-김동조>
그렇다면 깨달음은 어디서 오는가. 다음 문장이 답한다.
대다수 인간은 경험을 통해서만 배울 수 있다. 그러나 경험은 '일단 해본다'는 단순한 의미가 아니다. 자신의 행동에 어떤 의미가 있는지, 그 행동에 어떤 대가가 따라오는지 깨닫는 것을 말한다. 경험에서 깨달음은 '사전 준비 – 실행 – 사후 반성'의 과정에서 온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실행이 아니라 사전 준비와 사후 반성이다. 교육은 바로 이 과정을 가르치는 것이다.
<모두가 같은 곳을 바라보지만 서로 다른 꿈을 꾼다-김동조>
두 문장을 나란히 놓으면 하나의 긴장이 드러난다. 앞에서는 "대다수 인간은 경험을 통해서만 배운다"고 했다. 그런데 뒤에서는 "중요한 것은 실행이 아니다"라고 한다. 경험이 필수라면서 실행은 중요하지 않다니, 모순처럼 들린다.
그러나 이 긴장이 바로 이 글의 열쇠다. 실행은 필요조건이지만 충분조건이 아니다. 실행 없이는 배울 것이 없지만, 실행만으로는 아무리 많이 겪어도 피상(皮相)에 머문다. 사전 준비와 사후 반성이 빠진 경험은, 겪기만 할 뿐 남지 않는다. 세상에는 남들보다 훨씬 많은 것을 경험하고도 끝내 피상적인 인간들이 있다. 그들의 공통점은 하나다. 사전 준비와 사후 반성을 하지 않는다는 것.
이제 앞에서 미뤄둔 것들이 제자리를 찾는다. 박 교수가 말한 "아는 것과 모르는 것의 경계를 긋는 능력"은 사후 반성의 다른 이름이다. 내 행동에 어떤 의미가 있었고 어떤 대가가 따랐는지 되짚는 것, 그것이 곧 앎의 경계를 긋는 일이다. AI 시대에 배워야 할 세 가지 — 문제 파악, 과정 설계, 질문하는 법 — 역시 그렇다. 문제 파악과 과정 설계가 사전 준비이고, 실행은 이제 AI에게 상당 부분 맡길 수 있으며, 남는 것은 그 결과를 되짚는 사후 반성이다. 그리고 80억 개의 관점 중 무엇이 가치 있는가라는 질문의 답도 여기 있다. 준비와 반성을 거쳐 주체적으로 벼려진 관점만이, AI의 "하나의 관점"과 구별되는 값을 갖는다.
배움이 좋아서 대학이 재미없다는 말은, 사실 나는 이미 공부를 하고 있는데, 대학은 여전히 교육을 하고 있다는 것 아닐까. 나는 준비와 반성의 과정에 재미를 느끼는데, 시스템은 여전히 과정 없는 정답을 요구한다. 그 어긋남이 재미없음의 정체였다.
문제의 원인을 파악했다. 그러면 이제 문제의 해결책은 무엇일까.
박주용 교수(서울대 심리학과)

이충형 교수 (포스텍 인문사회확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