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의 실패에서 한국은 무엇을 배워야만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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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이 선망한 독일 모델은 제도의 우월성만이 아니라 저평가된 유로화, 러시아산 가스, 중국 시장, 외부 노동력이라는 국제 조건의 정렬 위에 서 있었다. 그 조건이 동시에 무너지자 탈원전·복지·규제라는 정치적 선택의 누적 비용이 드러났다. 독일의 위기는 이상 자체의 실패가 아니라 이상을 떠받칠 기반을 계산하지 않은 실패다. 한국은 독일을 숭배도 조롱도 하지 말고, 조건과 선택을 분리해 학습해야 한다.


독일이라는 착시 — 성공의 조건, 실패의 선택, 한국의 학습

우리가 본 것은 독일이었나, 한 시대였나

한국 사회에서 독일은 오랫동안 하나의 정답처럼 취급되었다. 강한 제조업, 두터운 복지, 노동자를 보호하는 제도, 원전을 끄고 재생에너지로 나아가는 용기, 난민에게 문을 여는 인도주의, 그리고 유럽을 이끄는 책임 있는 리더십. 정치 성향과 무관하게 독일은 인용하기 좋은 나라였다. 진보는 독일의 복지와 에너지 전환을, 보수는 독일의 제조업과 직업교육을 근거로 삼았다.

그런데 지금 독일에서 들려오는 소식은 다르다. 폭스바겐은 창사 이래 최대 규모의 구조조정을 발표했고, 독일 경제는 역성장을 반복했으며, 영국 이코노미스트는 1999년에 썼던 "유럽의 병자"라는 표현을 사반세기 만에 다시 꺼냈다. 극우 정당은 지지율 2위로 올라섰고, 총리는 "더 이상 현재의 복지 시스템을 유지할 재정을 조달할 수 없다"고 공개 선언했다.

여기서 질문이 생긴다. 우리가 독일에서 보았던 것은 정말 독일의 본질이었을까. 아니면 특정한 시대적 조건이 만들어낸 한때의 풍경이었을까. 이 글은 독일을 조롱하기 위한 글이 아니다. 독일이 왜 성공할 수 있었고, 그 성공이 어떤 착시를 낳았으며, 조건이 변한 뒤 무엇이 드러났는지를 차분히 따라가면서, 최종적으로는 한국이 무엇을 배워야 하는지를 묻는 글이다.

1.성공의 조건: 네 개의 축

1990년대의 독일은 지금과 정반대의 평가를 받았다. 통일 비용, 고금리, 강한 마르크화로 수출이 무너지자 이코노미스트는 독일을 "유럽의 병자"라 불렀다. 그 병자가 2000년대 이후 유럽의 압도적 강자로 변신한 과정에는 네 개의 외부 조건이 있었다.

첫째, 저평가된 유로화다. 독일이 마르크화를 계속 썼다면 통화 가치는 일본 엔화처럼 치솟아 수출을 짓눌렀을 것이다. 그러나 유로화는 독일과 그리스, 이탈리아, 포르투갈의 경제력을 평균 낸 통화였다. 독일 입장에서는 자국 경제력보다 현저히 싼 통화를 쓰게 된 셈이고, 이는 독일 제품의 가격 경쟁력을 구조적으로 끌어올렸다. 한 추계에 따르면 독일은 유로화 도입 이후 약 2조 달러에 이르는 이익을 본 최대 수혜국으로 꼽힌다.

둘째, 러시아산 저가 에너지다. 메르켈 정부는 탈원전과 탈석탄을 추진하면서 그 공백을 러시아 파이프라인 가스로 메웠다. 노르트스트림 1호(2011년)와 2호(2021년)가 개통되면서 2020년 기준 독일은 석탄 수입의 절반 이상, 천연가스 수입의 절반 이상을 러시아에 의존하게 되었다. 값싸고 안정적인 에너지는 에너지 집약적 제조업의 경쟁력과 낮은 물가를 동시에 가능하게 했다.

셋째, 중국 시장이다. 2000년대 이후 폭발적으로 성장한 중국은 독일 자동차와 기계를 대량으로 사들였다. 중국은 7년 연속 독일의 최대 교역국이었고, 폭스바겐 수익의 절반가량이 중국에서 나왔다는 평가가 있을 정도였다. 메르켈 총리는 16년 재임 동안 중국을 12차례 방문했고, 퇴임 시 중국 언론으로부터 "중국 인민의 오랜 친구"라는 이례적인 평가를 받았다.

넷째, 외부 노동력이다. 동유럽 노동력과 대규모 난민·이민자 수용은 고령화로 줄어드는 노동력을 보충하는 수단이기도 했다. 2015년 이후 독일은 연간 수십만에서 백만 명대의 순유입을 받아들였다.

이 네 개의 축은 서로를 강화했다. 싼 통화와 싼 에너지가 수출 경쟁력을 만들고, 중국 시장이 그 수출을 흡수하고, 벌어들인 돈이 복지와 에너지 전환의 비용을 감당하고, 외부 노동력이 인구 문제를 미뤄주었다. 독일의 제도가 무능했다는 뜻이 아니다. 독일의 제도는 이 조건들 위에서 매우 잘 작동했다. 문제는 그 다음이다.

2. 성공이 만든 착시

성공이 오래 지속되면, 성공의 원인에 대한 해석이 왜곡되기 쉽다. 독일 안팎에서 독일의 번영은 점차 "독일식 제도의 우월성"으로 설명되기 시작했다. 사회적 시장경제, 노사 공동결정, 관대한 복지, 과감한 에너지 전환이 성공의 원인으로 지목되었고, 그 제도들을 유지·확대하는 것이 곧 성공을 유지하는 길로 여겨졌다.

이 해석에는 검증되지 않은 전제가 숨어 있었다. 유리한 환율, 저렴한 에너지, 성장하는 중국, 유입되는 노동력이 앞으로도 계속된다는 전제다. 이 전제 위에서 독일은 원전을 껐고, 국방비를 줄였고, 규제를 쌓았고, 복지를 늘렸고, 내연기관의 우위를 과신했다. 각각의 결정은 당시의 맥락에서 나름의 합리성이 있었다. 메르켈 스스로 러시아 가스 도입에 대해 "당시로서는 대단히 합리적인 결정이었다"고 회고했고, 실제로 냉전기에도 소련은 신뢰할 만한 에너지 공급자였다.

착시의 핵심은 여기에 있다. 외부 조건이 만들어준 여유를 제도의 성과로 오인하면, 그 여유가 사라졌을 때 대비할 이유를 찾지 못한다. 조건이 좋을 때는 어떤 정책을 선택해도 비용이 잘 보이지 않는다. 비용은 조건이 나빠질 때 한꺼번에 청구된다.

3. 네 개의 축이 무너진 순간

청구서는 거의 동시에 도착했다. 숄츠 정부가 출범한 것은 2021년 12월이었다. 취임 78일 만에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했다. 노르트스트림 1호는 잠겼고, 2호는 폭발로 기능을 상실했다. 독일은 마지막 원전을 2023년 4월에 폐쇄했다. 유럽에서 가장 싼 에너지를 쓰던 나라가 순식간에 가장 비싼 에너지를 시장에서 사와야 하는 나라가 되었고, 물가는 유럽 최고 수준으로 치솟아 좀처럼 내려오지 않았다.

같은 시기에 중국이라는 축도 흔들렸다. 미중 전략 경쟁이 심화되고 중국 경기가 둔화되는 가운데, 더 결정적으로는 중국 제조업이 기술적으로 추격을 완료해가고 있었다. 중국 신차의 60%가 전기차나 하이브리드인 시장에서 내연기관에 강한 독일차는 설 자리를 잃었다. 폭스바겐의 중국 판매는 급감했고, 유럽 본토에서조차 중국 브랜드가 독일 브랜드를 추월하는 현상이 나타났다. 미국의 IRA 법안은 유럽 최대 자동차 생산국인 독일에 추가 타격을 가했다.

결과는 지표로 나타났다. 독일 경제는 2023년과 2024년 연속 역성장했고, 기업 파산은 급증했으며, 공장 해외 이전 논의가 일상화되었다. 폭스바겐은 10만 명대 감원과 독일 내 공장 폐쇄를 발표했다. EU 전체로 보면 2025년 대중 무역적자가 사상 최고치를 기록했고, 사상 처음으로 모든 회원국이 동시에 대중 적자를 냈다. 독일 총리가 위안화 저평가를 지목하며 "제2의 플라자 합의"까지 거론한 것은, 관세보다 환율 조정이 쉬워 보일 만큼 상황이 절박해졌다는 방증이다.

다만 여기서 균형이 필요하다. 이것이 곧 "독일의 붕괴"를 의미하지는 않는다. 독일은 여전히 세계적 수준의 기술 기업과 숙련 인력, 견고한 재정 여력을 가진 나라다. 지금 벌어지는 일은 파산이 아니라, 특정 조건에 최적화되었던 성장 모델이 조건 변화 앞에서 겪는 장기적 구조 위기이자 조정 과정으로 보는 것이 정확하다.

4. 이상주의의 비용

그렇다면 이 위기는 외부 충격의 결과인가, 내부 선택의 결과인가. 이 글의 판단은 이렇다. 외부 충격은 취약성을 드러낸 계기였고, 취약성 자체는 오랜 정치적 선택의 누적으로 형성되었다.

가장 선명한 사례가 에너지 정책이다. 탈원전은 후쿠시마 이후 독일 사회의 광범위한 합의였고, 재생에너지 확대는 기후 대응이라는 정당한 목표를 향했다. 문제는 목표가 아니라 계산이었다. 재생에너지에는 "간헐성"이라는 물리적 제약이 있다. 독일어권에는 이를 상징하는 단어까지 있다. 둔켈플라우테(Dunkelflaute), 해도 없고 바람도 없는 어둡고 고요한 날씨다. 이 현상은 연간 열흘에서 보름가량, 길게는 2주 연속으로 나타난다. 재생에너지 비중이 낮을 때는 문제가 되지 않던 자연 현상이, 발전 비중 절반 이상을 재생에너지에 맡긴 순간 전력망 전체의 리스크로 변했다. 실제로 한 차례의 둔켈플라우테 기간에 북해의 풍력 발전은 정격 용량의 극히 일부만 생산했고, 독일은 퇴역시키지 않은 화석연료 발전소를 총동원하고도 부족분을 이웃 나라에서 수입해야 했다.

여기서 유럽 이웃들의 불만이 터져 나왔다. 독일은 자국 원전을 폐쇄하면서도, 전력이 남을 때는 마이너스 가격으로 밀어내고 부족할 때는 프랑스의 원전 전력과 북유럽의 수력 전력을 대량으로 끌어왔다. 통합된 유럽 전력망 안에서 이웃 나라들의 전기요금은 함께 치솟았다. 노르웨이 남부의 요금이 폭등하고, 체코가 구매력 기준 유럽 최고 수준의 전기요금을 기록하고, 스웨덴 에너지 장관이 공개적으로 독일을 비난하는 일이 벌어졌다. 일부에서는 이를 "독일의 얌체 전략"이라 부른다. 자극적인 표현이지만, 그 실체는 감정의 문제가 아니라 비용의 외부화라는 구조의 문제다. 자국 영토 안의 발전원만 보면 독일은 친환경 국가다. 그러나 폐쇄한 원전의 빈자리를 이웃 나라의 원전 전력 수입으로 메운다면, 그것을 실질적인 탈원전이라 부를 수 있는가. 저장 기술과 전력망이 준비되지 않은 상태의 탈원전은, 도덕적 명분의 비용을 시간적으로는 미래에, 공간적으로는 이웃에 전가하는 선택이었다는 비판을 피하기 어렵다. 물론 유럽 전체가 독일을 일방적으로 비난하는 것은 아니며, 통합 전력망 자체는 평시에 모두에게 효율을 제공해온 제도라는 점도 함께 봐야 한다.

복지와 연금에서도 같은 구조가 보인다. 독일 연금은 보험료를 쌓아 굴리는 적립식이 아니라, 현재 노동세대가 낸 돈을 현재 은퇴세대에게 바로 지급하는 부과식이다. 이는 "세대 간 계약"이라는 아름다운 이름을 갖고 있지만, 후속 세대가 선행 세대보다 많거나 최소한 비슷해야 유지되는 계약이다. 1960년대에는 근로자 여섯 명이 은퇴자 한 명을 부양했지만, 베이비붐 세대(1955~1969년생)가 은퇴하는 지금은 그 비율이 급격히 악화되고 있으며 2050년경에는 두 명이 한 명을 부양하는 구조가 예상된다. 이미 보험료만으로는 지급액을 감당하지 못해 연방 예산의 약 4분의 1이 연금 보전에 투입되고 있고, 일부 전망에 따르면 2045년경에는 그 비중이 예산의 절반에 이를 수 있다는 우려까지 나온다. 여기에 시민수당을 둘러싼 부정수급·근로유인 논란이 겹치면서, 복지의 도덕적 정당성과 재정의 지속 가능성 사이의 긴장이 정치의 중심 의제로 올라섰다.

오해를 피하기 위해 분명히 하자. 이 글의 논지는 복지 축소론이 아니다. 복지는 선의만으로 유지되지 않는다. 복지를 지탱하는 것은 생산성, 노동인구, 산업 경쟁력, 세수 기반이다. 성장 기반을 약화시키면서 복지 지출만 유지하려는 선택은 결국 미래세대의 부담으로 청구된다. 규제와 관료주의도 마찬가지다. 건설 허가에 수백 일이 걸리고, 기업이 국가에 제출해야 할 문서가 산을 이루고, 사전 규제가 "문제 없음을 네가 증명하라"는 방식으로 작동하는 나라에서, 새로운 산업이 빠르게 자라기는 어렵다.

여기서 이 글의 핵심 명제가 나온다. 이상주의가 문제인 것은 높은 가치를 추구하기 때문이 아니다. 그 가치를 실현하기 위해 필요한 비용, 기술, 안보, 산업 기반을 계산하지 않을 때 문제가 된다. 탈원전도, 관대한 복지도, 두터운 노동 보호도 그 자체로 악이 아니다. 그것들을 떠받칠 물리적·재정적 기반 없이 명분만 앞세울 때, 이상은 부채가 된다.

5. 독일은 왜 방향을 바꾸고 있는가

주목할 것은 독일이 이 진단을 스스로 받아들이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중도우파와 중도좌파의 연립정부는 2025년 「경제 회복과 고용을 위한 프로그램」이라는 30여 개 항목의 개혁안에 합의했다. 내용을 보면 "우리가 알던 독일"과 거리가 멀다.

중산층 감세와 고소득자 증세를 결합한 세제 개편. 기간제 고용을 최대 4년까지 허용하고 고소득자에 대해서는 해고를 자유화하는 노동시장 유연화. 병가 진단서 규정 강화. 부정수급 적발을 위한 기관 간 데이터 연계와 외국인 수급 요건 강화. 허가 신청 후 일정 기간 무응답 시 자동 승인으로 간주하는 관료주의 개혁과 공공부문 인력 감축 목표. 연방정부가 직접 공공주택을 짓는 주택공사의 신설. 정년과 연금 수급 연령의 단계적 연장, 그리고 스웨덴식 개인 투자계정을 통한 연금 보완. 여기에 국방비 확대와 에너지 공급 안정성 강화, 부채 브레이크 재검토 논의까지 더해진다.

이 변화를 두고 "독일의 한국화"라는 표현이 나온다. 자극적으로 들리지만, 정확히 정의하면 이렇다. 독일의 한국화란 독일이 한국과 같아진다는 뜻이 아니라, 복지·환경·절차적 정당성을 정책의 최우선에 두던 국가가 성장·산업·안보·속도·경쟁력을 다시 전면에 배치하기 시작했다는 의미다. 부정수급을 시스템으로 걸러내고, 공기업을 만들어 국가가 직접 주택을 공급하고, 노동시장을 유연화하는 해법들이 공교롭게도 한국이 이미 운영해온 제도와 수렴한다는 관찰이기도 하다.

중요한 것은 이 전환의 성격이다. 독일은 기존 모델을 전면 폐기하는 것이 아니라 현실에 맞게 수정하고 있다. 복지국가를 해체하는 것이 아니라 지속 가능하게 만들려는 것이고, 에너지 전환을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저장·수소·전력망이라는 빠진 기반을 뒤늦게 채우려는 것이다. 이 개혁이 성공할지는 열린 문제다. 그러나 방향 전환 자체가 말해주는 바는 분명하다. 독일 스스로가 과거의 선택에 계산되지 않은 비용이 있었음을 인정한 것이다.

6. 한국이 배워야 할 국가 운영의 원칙

이제 시선을 한국으로 돌리자. 한국이 독일의 과거 모델을 그대로 모방해서는 안 되는 이유는 단순하다. 한국의 조건이 독일보다 훨씬 가혹하기 때문이다.

한국은 에너지 자원이 거의 없는 수입국이면서, 전력망이 어느 나라와도 연결되지 않은 "에너지 섬"이다. 독일은 둔켈플라우테가 와도 프랑스와 북유럽에서 전기를 끌어올 수 있었지만, 한국은 부족한 전력을 빌려올 이웃이 없다. 한국은 제조업과 수출 의존도가 독일 못지않게 높고, 중국 시장과 미국 안보에 동시에 연결되어 있으며, 세계에서 가장 빠른 저출산·고령화를 겪고 있고, 북한과 군사적으로 대치하는 분단국가이며, 반도체·자동차·배터리·조선이라는 소수 전략산업에 국운이 걸려 있다. 독일이 유리한 조건 위에서도 흔들렸다면, 그런 완충장치조차 없는 한국은 독일보다 더 철저하게 현실주의적으로 국가를 운영해야 한다.

그 현실주의를 일곱 가지 원칙으로 정리한다.

첫째, 가치를 포기하지 않되 비용을 계산할 것. 환경, 복지, 인권, 노동권은 중요하다. 그러나 이를 실현하는 기술적·재정적·산업적 조건을 함께 설계하지 않으면, 가치는 선언에 그치거나 부메랑이 된다.

둘째, 에너지 정책을 도덕이 아니라 국가 생존의 관점에서 볼 것. 원전이냐 재생에너지냐의 이념적 편 가르기를 넘어, 안정성·가격·탄소배출·안보를 함께 고려한 포트폴리오로 접근해야 한다. 프랑스가 1980년대부터 운영해온 탄력운전 원전처럼 재생에너지의 간헐성을 보완하는 유연성 자원의 확보가 핵심이며, 최근 한국 정부가 "원전과 재생에너지가 함께 못 갈 이유가 없다"는 방향을 밝힌 것은 이 점에서 의미 있는 전환이다.

셋째, 특정 국가와 시장에 과도하게 의존하지 말 것. 독일의 대중국 의존은 한국의 거울이다. 시장·에너지·공급망·기술 동맹을 다변화하여 단일 실패점을 없애야 한다.

넷째, 복지의 확대보다 지속 가능성을 먼저 설계할 것. 현재 세대의 정치적 요구를 충족하기 위해 미래세대에 비용을 전가하는 구조는 반드시 청구서로 돌아온다. 연금·의료·노동시장·이민 정책을 하나의 패키지로 개혁해야 한다.

다섯째, 제조업과 기술 경쟁력을 국가의 기반으로 인식할 것. 산업 경쟁력이 무너지면 복지도, 환경도, 국방도, 문화도 장기적으로 유지할 수 없다. 독일의 복지국가를 지탱한 것은 복지 제도가 아니라 수출 제조업이었다.

여섯째, 정책을 선의가 아니라 결과로 평가할 것. 의도가 선해도 결과가 에너지 가격 상승, 산업 이탈, 세대 갈등, 재정 악화라면 수정할 수 있어야 한다. 정책의 무오류성을 전제하는 정치문화가 가장 위험하다.

일곱째, 변화하는 국제질서에 민첩하게 대응할 것. 냉전 이후의 자유무역과 세계화가 영구히 지속된다는 전제는 이미 무너졌다. 경제안보, 산업정책, 기술패권, 군사안보를 통합적으로 사고해야 한다.

동시에 경계할 것이 있다. 한국은 독일과 반대로만 하면 성공한다는 착각이다. 한국 역시 독일과 같은 착시에 빠질 수 있다. 반도체 호황을 제도의 우월성으로 오인할 수 있고, 특정 시장 의존을 당연시할 수 있으며, 인구 문제의 청구서를 미룰 수 있다. 독일의 이야기는 남의 이야기가 아니라, 조건이 좋을 때 비용 계산을 멈춘 모든 나라의 이야기다.

이상과 현실은 어떻게 결합되어야 하는가

이 글의 결론이 "이상주의는 틀리고 현실주의는 옳다"여서는 안 된다. 현실주의만으로 운영되는 국가는 방향을 잃고, 이상주의만으로 운영되는 국가는 기반을 잃는다. 이상은 국가가 어디로 가야 하는지를 말해주고, 현실은 그곳까지 어떻게 갈 수 있는지를 말해준다. 이상이 현실을 무시하면 실패하고, 현실이 이상을 잃으면 타락한다.

독일의 문제는 환경·복지·인권이라는 가치 자체에 있지 않았다. 그 가치를 유지하기 위한 에너지·산업·재정·안보의 기반을 충분히 준비하지 않은 데 있었다. 독일 모델은 보편적이고 영구적인 성공 공식이 아니라, 특정 시대의 조건이 만든 조건부 모델이었다. 그 조건이 사라지자 모델의 비용이 드러났고, 독일은 지금 그 비용을 치르며 방향을 바꾸는 중이다. 이 조정이 성공할지는 아직 알 수 없다. 회복 불가능한 쇠퇴인지, 구조개혁을 통한 전환기인지는 열려 있다.

한국이 할 일은 독일을 숭배하는 것도, 조롱하는 것도 아니다. 독일의 성공을 가능하게 했던 조건과 실패를 불러온 선택을 분리해서 읽고, 우리의 조건 위에서 우리의 선택을 설계하는 것이다.

국가의 실패는 이상을 품었기 때문에 발생하는 것이 아니다. 이상을 떠받칠 현실의 기반을 만들지 않은 채, 선의만으로 비용과 위험이 사라질 것이라 믿을 때 시작된다.


요약

  1. 독일의 번영은 제도의 우월성만이 아니라 저평가된 유로화, 러시아산 저가 에너지, 중국 시장, 외부 노동력이라는 네 개의 국제적 조건이 정렬된 결과였다.
  2. 성공의 장기화는 외부 조건의 이익을 제도의 성과로 오인하는 착시를 낳았고, 이 착시 위에서 탈원전·복지 확대·규제 누적·국방 축소 같은 선택이 이루어졌다.
  3. 우크라이나 전쟁, 에너지 단절, 중국의 기술 추격, 미중 갈등이라는 외부 충격은 위기의 원인이 아니라 누적된 정치적 선택의 취약성을 드러낸 계기였다.
  4. 독일 에너지 전환의 실질은 저장·전력망 기반 없이 이웃 나라의 원전·수력에 변동성 비용을 외부화한 구조였으며, 이는 "한 국가의 친환경성은 자국 발전원만으로 판단할 수 없다"는 문제를 제기한다.
  5. 독일의 2025년 개혁(감세·노동 유연화·복지 통제·규제 축소·국방 확대)은 과거 모델의 폐기가 아니라 현실에 맞춘 수정이며, 독일 스스로 계산되지 않은 비용의 존재를 인정한 것이다.

한국에 대한 정책적 교훈 7개

  1. 가치(환경·복지·인권·노동권)를 추구하되 그 실현에 필요한 기술·재정·산업 기반을 함께 설계한다.
  2. 에너지 정책은 이념이 아닌 안정성·가격·탄소·안보의 포트폴리오로 접근하며, 탄력운전 원전 등 유연성 자원을 확보한다. 에너지 섬인 한국에는 독일식 이웃 의존이 애초에 불가능하다.
  3. 중국·미국 등 특정 시장·국가에 대한 과도한 의존을 다변화하여 단일 실패점을 제거한다.
  4. 복지는 확대 이전에 지속 가능성을 설계하고, 연금·의료·노동·이민을 하나의 패키지로 개혁하여 미래세대 전가를 막는다.
  5. 제조업과 기술 경쟁력을 복지·환경·국방을 떠받치는 국가 기반으로 인식하고 투자한다.
  6. 정책을 선의가 아니라 결과로 평가하고, 결과가 나쁘면 수정할 수 있는 정치문화를 만든다.
  7. 자유무역·세계화의 영속을 전제하지 말고 경제안보·산업정책·기술패권·군사안보를 통합적으로 사고한다.

주요 근거와 출처 목록

본 글은 6개의 영상을 근거로 삼았다.

  1. 폭스바겐 구조조정과 위안화 절상 논쟁 (플라자 합의 재소환, EU 대중 무역적자, 메르츠 총리 발언)https://youtu.be/nZ5vlxgXe2w?si=HUrrgSytbTOGcQ_O
  2. 메르켈 시대의 네 가지 행운과 숄츠 정부의 위기 (유로화·러시아 가스·중국 시장·난민 수용, "유럽의 병자" 재등장)https://youtu.be/ZZyIicEeXJ8?si=4GcyeimLt128cWJ3
  3. 독일 연금·복지 위기 (부과식 연금 구조, 부양비 악화, 시민수당 논란, 메르츠 총리의 복지 지속불가 선언)https://youtu.be/ASWxLK2vEU8?si=XFGoPFb5kje2g7nj
  4. 독일 2025년 경제개혁 프로그램 (감세, 기간제 4년 허용, 고소득자 해고 자유화, 부정수급 데이터 연계, 독일판 주택공사)https://youtu.be/jQqc6z8y4mM?si=epKWRhZT1X5sna3p
  5. 둔켈플라우테와 재생에너지의 간헐성 문제 (2024년 11월 전력 위기, ESS·수소의 한계, 분산 투자 실패론) https://youtu.be/sKSi9u3gnWs?si=bO3dlrVjDCqwPGCu
  6. 유럽 전력망 갈등과 독일의 비용 외부화 (노르웨이·스웨덴·체코의 반발, 프랑스 탄력운전 원전, 한국의 원전+재생 병행 전환)https://youtu.be/ve0S-o7dpHs?si=pLKbj-FI3sYt1OV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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